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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연대기(2017)의 월경 담론과 여성 서사

by 취다삶 2026. 2. 11.

‘피의 연대기(2017)’는 김보람 감독이 연출한 장편 다큐멘터리로,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침묵되고 금기시되었던 ‘월경’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월경은 절반의 인류가 경험하는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오랫동안 부끄러운 일, 숨겨야 할 일, 혹은 수치스러운 일로 치부되어왔다.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 ‘침묵’의 역사를 추적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몸과 삶, 그리고 한국 사회가 어떻게 여성의 신체를 규정하고 억압해 왔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단순한 월경 정보 전달을 넘어서, 이 영화는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 교육의 부재, 미디어의 왜곡된 이미지, 그리고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인식하고 말하게 되는 과정까지 포괄한다. ‘피의 연대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며, 동시에 오래된 금기에 맞선 용기 있는 기록이다.

 

 

피의 연대기(2017) 포스터 사진
피의 연대기(2017)

 

 

 

월경을 말하다: 침묵된 생리의 역사와 사회적 금기

‘피의 연대기’는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월경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지, 아니 말하지 못하게 해왔는지를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월경은 여성이라면 대부분 경험하는 보편적인 생리 현상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월경은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아왔다. 초경을 맞은 소녀는 축하를 받기보다는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을 경험하고, 생리통을 앓는 학생은 정당한 결석 사유조차 인정받지 못하며, 여성은 자신의 생리 기간조차 숨기기 위해 온갖 장치를 동원해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의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 침묵이 어떤 방식으로 세습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와 인터뷰를 통해 조명한다. 다큐멘터리 속에는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등장해 자신의 월경 경험을 고백한다. 기성세대 여성들은 생리대를 천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시절, 그 천을 몰래 빨아야 했던 기억, 생리통을 참아야 했던 직장 생활 등을 말한다. 반면, 청소년과 20대 여성들은 생리용품 구매조차 눈치를 봐야 했던 일상, 남학생과 남성 교사들 앞에서 생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던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이러한 증언은 월경이라는 현상이 단지 신체적 고통을 넘어,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받는 대상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남성들의 시선과 언어 속에 드러나는 월경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다. ‘피의 연대기’는 영화 속 광고나 TV 프로그램, 교과서 등의 사례를 통해, 월경이 얼마나 왜곡되고 미화되었는지를 비판한다. 광고 속 생리대는 파란 액체로 생리를 상징하고, ‘상쾌하다’, ‘자유롭다’는 메시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생리통, 출혈, 정서적 변화 등 실제 여성들이 겪는 문제는 철저히 배제된다. 이는 사회가 월경을 불편한 진실로 치부하고, 이를 감추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에피소드에서 핵심적인 메시지는 ‘말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경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감추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가 부끄러운 것이다. ‘피의 연대기’는 이 금기를 깨뜨리는 작업을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든다. 말하는 것, 보여주는 것, 드러내는 것은 단지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는 첫걸음이다.

 

 

페미니즘 다큐멘터리로서의 실험과 진정성

‘피의 연대기’는 단순히 월경이라는 주제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명백히 ‘페미니즘 다큐멘터리’로 자리매김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월경이라는 테마를 통해 여성의 몸, 경험, 목소리, 그리고 사회적 억압 구조를 조망하며,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사회운동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보람 감독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인터뷰이의 삶과 기억, 역사적 자료를 교차 편집하면서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여성 경험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다. 이 영화의 진정성은 바로 그 ‘개인적 접근’에서 비롯된다. 감독 자신이 카메라 앞에 서고,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관객은 그녀의 시선을 통해 영화 전체를 따라가게 된다. 이는 기존의 객관적인 다큐멘터리 문법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방식이며, 여성의 경험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시선으로만 말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관객에게 더 깊은 공감과 몰입을 유도하며,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는 자신의 경험이 존중받는 느낌을 준다. 또한 영화는 월경을 단순한 생리현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여성의 삶 전반과 연결된 문화적, 정치적, 교육적 요소로 확장시킨다. 생리대의 가격 문제, 생리공결제 도입 논란, 생리컵과 같은 대안 생리용품에 대한 정보 부족 등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정책과 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제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적 목소리를 낸다. 이는 여성의 신체와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 권력 구조에 의해 통제되어 왔는지를 드러내며, 페미니즘의 핵심 주제인 ‘몸의 정치학’을 정면으로 다룬다. 영상 언어 측면에서도 ‘피의 연대기’는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장면들을 적극 활용한다. 생리대를 접는 손의 움직임, 피가 물에 번지는 장면, 여성의 얼굴 클로즈업, 빠르게 교차하는 광고 화면 등은 정보 전달을 넘어서 감정을 시각화하고, 그 경험을 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영화는 설명보다 감각에 집중하며, 공포나 충격 대신 일상의 리얼리티로 접근해 관객에게 내면적인 공감을 이끌어낸다. ‘피의 연대기’는 페미니즘 다큐멘터리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수행하면서도, 그것을 과격하거나 배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말 걸기’ 방식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월경을 겪는 이들도, 겪지 않는 이들도 모두 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영화는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를 아우른다. 이는 공감과 연대의 기반 위에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며, 극단적인 이분법이 아닌, 현실 속의 연결을 중시하는 페미니즘 관점을 보여준다.

 

 

몸과 정체성: 여성 서사의 해방과 연대의 가능성

‘피의 연대기’는 단지 월경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여성 서사’를 복원하고 확장하는 작업이다. 여성의 몸은 오랫동안 타자의 시선 아래 놓여 있었고, 여성의 경험은 객관적, 과학적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되거나, 배제되어왔다.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 왜곡과 침묵을 깨고,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말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주체로 서는 여정을 기록한다. 여성의 몸은 생리, 임신, 출산, 폐경 등 끊임없는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은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해석할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피의 연대기’는 이 문제를 지적하며,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스스로 찾도록 격려한다. 이는 단지 정보 제공의 차원이 아니라, 자율성과 주체성 회복의 문제다. ‘피의 연대기’의 인터뷰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과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그것이 부끄럽거나 더럽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는 말하기의 해방이자, 기억의 회복이며, 여성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다. 다큐멘터리는 특히 소수자 여성, 장애 여성, 비혼 여성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인터뷰 대상으로 삼으며, 단일한 여성 경험이 아니라 다층적인 여성 삶을 조명한다. 이는 여성 안에서도 계급, 세대, 문화에 따라 경험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며, 진정한 의미의 연대는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함을 시사한다. ‘피의 연대기’는 이처럼 포괄적인 서사를 통해, 페미니즘이 단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양한 목소리의 조화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 작품은 ‘몸’을 단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닌,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즉, 여성의 몸은 단지 피와 자궁, 호르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억압, 통제와 해방의 장이다. 이 몸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규범화되고 대상화되며, 그 안에서 여성은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받아왔다. 그러나 ‘피의 연대기’는 그 시선을 거부하고,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곧 여성 서사의 탈환이자, 정체성 정치의 핵심이다. ‘피의 연대기’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신은 누구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는가?” 이 질문은 여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관객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단지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몸과 감정, 기억을 어떻게 말하고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체성의 정치학과도 연결되며, 공감과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결국 ‘피의 연대기’는 단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은 선언이고, 회복이며, 연대의 시작이다. 여성의 몸을 통해, 여성의 삶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이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잃어버렸는지를 말하고, 동시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다시 써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가 갖는 가장 큰 힘이며,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게 되는 이유다.

 

‘피의 연대기(2017)’는 월경이라는 가장 일상적이지만, 가장 침묵되어온 주제를 통해 여성의 몸, 감정, 기억, 서사를 회복하려는 진정성 있는 작업이다. 이 영화는 단지 공감의 다큐멘터리를 넘어서, 사회적 구조와 억압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화를 이끌어내는 도전이다. 김보람 감독은 자신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을 말해야 하며,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피의 연대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대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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