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딜릴리(Dilili à Paris, 2018)’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거장 미셸 오슬로가 연출한 작품으로, 20세기 초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소녀 딜릴리가 인신매매 조직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를 담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권, 여성해방, 예술의 가치 등을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독특한 서사 구조를 지닌 작품입니다. 실사 배경 위에 2D 애니메이션을 얹은 독창적인 시각 스타일은 과거의 파리를 시적으로 되살리며, 시청각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어린이 영화라는 외형을 갖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종 문제, 젠더 억압, 제국주의, 계몽의 필요성 등 매우 심오한 주제들이 담겨 있어 모든 연령층의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글에서는 딜릴리라는 인물을 통해 구현된 인권의 서사, 파리라는 도시가 갖는 상징성과 현실성,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봅니다.

벨 에포크 시대, 소녀의 눈으로 본 인권의 풍경
‘파리의 딜릴리’는 단순히 시대적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가 가진 모순과 이중성을 소녀의 시선을 통해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는 예술과 과학, 건축, 사상이 꽃피던 파리의 황금기로 기억되지만, 그 찬란한 외피 뒤에는 인종 차별, 여성 억압, 사회 계급의 불균형이라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딜릴리는 뉴칼레도니아 출신의 혼혈 소녀로, 외모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을 온몸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더 많은 것을 관찰하고 질문하며 성장합니다. 딜릴리는 기자인 친구 오렐과 함께 파리 전역을 돌아다니며, 곳곳에서 유명 인물들을 만납니다. 마리 퀴리,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콜레트, 퀴리 부인, 사라 베르나르 등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존 인물들은 딜릴리에게 다양한 지식과 가치, 그리고 여성으로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교양의 습득이 아니라, 억압된 여성들이 어떻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지를 딜릴리의 눈을 통해 학습하는 계몽적 여정입니다. 딜릴리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신매매 조직 ‘남성단(Mâles-maîtres)’이 저지르는 악행에 맞서 싸울 용기를 얻게 되며, 개인적 성장을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시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어린 소녀의 시선을 통해 매우 무거운 주제를 가볍지 않게, 그러나 강요 없이 풀어낸다는 것입니다. 딜릴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관찰자의 입장에서도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침착하고 단단한 태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큰 감정적 울림을 느끼게 하며, 사회적 억압을 이겨내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은 자신을 지키며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벨 에포크 시대는 영화 내에서 단순한 미술적 배경이 아닌, 이중적 의미의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그 안에 잠재된 폭력과 억압, 그러나 그 속에서 피어난 지성과 예술, 저항과 연대는 딜릴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재해석되며, 시대적 풍경을 오늘날의 시선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처럼 ‘파리의 딜릴리’는 벨 에포크 시대를 미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시대를 살아간 ‘진짜 인물’들의 시선으로 조명하면서, 소녀의 눈을 통해 사회를 다시 읽게 하는 작품입니다.
파리라는 도시가 품은 예술, 모순, 그리고 연대의 상징성
‘파리의 딜릴리’에서 파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주체이자, 사건의 장이자, 감정의 매개입니다. 미셸 오슬로는 파리를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역사, 예술, 철학, 그리고 사회 문제를 시각적으로 담아냅니다. 특히 실사 사진 위에 애니메이션을 입힌 독특한 방식은 도시의 현실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확보하면서, 마치 딜릴리와 함께 살아있는 파리를 여행하는 듯한 생생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파리의 풍경은 딜릴리의 여정을 따라가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오페라 극장, 에펠탑, 물랭 루즈, 루브르 박물관, 세느강, 지하 공동묘지까지—각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그 공간이 갖는 상징적 의미와 딜릴리의 감정 변화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에펠탑은 진보와 기술의 상징으로, 딜릴리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장소로 등장하며, 지하 동굴은 남성단이 여성들을 감금하는 어두운 공간으로 묘사되어 인간의 본능적 폭력성과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도시의 공간들은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감정의 리듬을 제공하며, 딜릴리의 감정 여정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특히 다양한 실존 인물들이 각 공간에 등장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도시가 기억하고 있는 인물과 사상의 축적을 상기시키며 파리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인류 지성의 무대였음을 환기시킵니다. 한편 이 도시에는 분명한 모순이 존재합니다. 예술과 사상의 중심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과 여성 혐오가 강하게 남아 있고, 도시의 발전은 특정 계층에만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딜릴리는 이를 직접적으로 목격하며,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이 진실을 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체득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순을 회피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연대를 찾아냅니다. 마리 퀴리와 같은 여성 과학자, 콜레트와 같은 작가, 사라 베르나르와 같은 배우는 모두 당시 파리라는 도시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연대를 실천한 인물들입니다. 이러한 연대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도시란 단지 건축과 문화의 집합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연대는 공간을 넘어 시대와 세대마저도 이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파리의 딜릴리’는 파리를 단순한 문화 유산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싸워온 전장의 흔적으로 보여주며, 그 안에서 딜릴리라는 새로운 세대가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판단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만듭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지닌 교육적 서사와 계몽적 미학
‘파리의 딜릴리’는 애니메이션 장르가 결코 유치하거나 단순한 어린이용 콘텐츠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미셸 오슬로는 <키리쿠> 시리즈부터 꾸준히 ‘계몽’과 ‘다문화’에 집중해온 감독이며,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애니메이션이 사회적 교육과 인문학적 통찰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음을 입증합니다. 우선 시각적 측면에서, 이 영화는 실사 사진을 바탕으로 한 공간 위에 2D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배치함으로써 시청각적 이질감을 극복하고, 오히려 현실성과 상상력이 결합된 독창적인 미학을 구축합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적 장소 속을 살아가는 인물’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며, 어린이들에게는 시각적 재미를, 성인 관객에게는 시적 감흥을 동시에 제공합니다. 또한 이야기 구성은 전형적인 갈등-해결 구조를 따르지만, 그 안에서 수많은 사회적 주제들이 유기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여성의 권리, 인종 정체성, 언론의 자유,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계몽주의 사상의 현대적 해석까지—이 모든 주제가 어린 딜릴리의 여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이는 어린이 관객에게도 과하게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질문의 제기’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무엇보다 ‘남성단’이라는 가상의 조직을 통해 미셸 오슬로는 명확한 사회 비판을 시도합니다. 여성들을 유괴해 지하 감옥에 가두고, 말을 못 하게 만들며, 전통적 여성 역할을 강요하는 이 집단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 혐오적 구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딜릴리는 이 조직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 인물로서, 단순히 ‘구출되는 아이’가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구도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에서 드문 구조로,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명확히 구분됩니다. 딜릴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협력하며, 행동하는 주체입니다. 이는 젠더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제시함과 동시에, 어린이에게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음을 일깨우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결국 ‘파리의 딜릴리’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단순한 오락이 아닌, 지적 자극과 정서적 공감을 모두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서사 수단임을 증명합니다. 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혁신을 통해, 우리가 애니메이션에 기대하는 ‘재미’를 넘어 ‘성찰’과 ‘질문’을 남기며, 그것이 곧 예술의 본질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파리의 딜릴리’는 소녀의 눈으로 본 역사, 사회, 인간의 이야기를 섬세하고도 용감하게 풀어낸 애니메이션입니다. 벨 에포크의 화려함 속에 숨겨진 모순을 들춰내며, 파리라는 도시와 시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동시에, 연대와 인권, 목소리의 중요성을 아름답게 담아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동화가 아닌, 모두가 함께 읽어야 할 현대적 우화로서,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