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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분노의 폭력성)

by 취다삶 2026. 1. 11.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분노의 폭력성)는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이자, 한국 독립영화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충격을 남긴 작품 중 하나다. 이 영화는 한국형 액션 누아르의 시작점이자, 장르의 실험성과 서사의 거칠고 생생한 현실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단순히 스타일리시한 폭력 영화가 아닌,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억압된 분노, 생존을 위한 싸움을 진지하게 조명한 작품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특히 4개의 옴니버스 에피소드를 통해 구성된 이 영화는 인물 중심의 감정 서사와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끌어안으며, 기존 상업영화와 전혀 다른 결의 에너지를 분출한다. 본문에서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분노의 서사 구조, 액션 스타일과 리얼리즘, 그리고 한국 사회 속 폭력의 은유를 중심으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포스터 사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분노와 절망의 서사 구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명확한 플롯을 가진 전통적인 서사 영화라기보다는, 네 개의 단편 에피소드가 하나의 감정 흐름으로 연결된 옴니버스 형식을 취한다. 이 각각의 에피소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주제를 공유한다. 바로 ‘분노’와 ‘폭력’,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절망’이다. 이 영화는 분노를 단순한 감정의 폭발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 불평등, 억압, 불공정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생존 방식이며, 무기이자 저항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형사 역할을 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그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폭력도 감수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폭력은 결과적으로 더 큰 폭력의 고리를 만들고, 주인공 역시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순환 속에 놓이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 ‘모든 것이 타이트하다’는 비정규직 청년이 겪는 경제적 궁핍과 불안정을 다루며, 그가 점차 범죄로 내몰리는 과정을 통해 현대 청년층의 좌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모두 ‘정상적인 삶’에서 밀려나 있고, 제도권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폭력이며, 이는 단지 물리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류승완 감독은 이러한 폭력과 분노를 드라마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형태로 제시한다. 특히 대사보다는 행동과 시선, 반복적인 일상 묘사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며, 관객은 그들의 서사에 이성보다 본능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구성은 한국 사회의 불균형 구조, 특히 1997년 IMF 이후 본격화된 청년 실업, 계층 이동 단절, 그리고 제도적 보호망의 부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이야기를 대중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시선으로 포착한다. 그 결과,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폭력의 감정’을 서사 구조로 삼은 강력한 현실 보고서가 된다.

액션의 미학과 리얼리즘의 융합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보여준 ‘액션’의 형식 때문이다. 기존 상업영화에서의 액션은 통제된 공간과 기획된 동선을 바탕으로 연출되며, 관객에게는 시각적 쾌감을 주는 장르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이 작품에서 액션을 하나의 정서 표현으로 사용한다. 즉, 액션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드러내는 내러티브 장치가 된 것이다. 액션 장면들은 대부분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되며, 의도적으로 불안정한 시선과 흔들림을 강조한다. 이는 관객에게 현장감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주며, 동시에 인물의 감정 상태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거리 싸움, 골목에서의 추격전, 폐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몸싸움 등은 과장된 기술이 아니라, 실제 싸움과 비슷한 거칠고 생존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이 영화가 ‘액션 누아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며, 이후 《짝패》, 《아라한 장풍대작전》 등으로 이어지는 류승완 액션 스타일의 출발점이 된다. 무술을 배운 감독답게, 류승완은 동작의 정확성과 리듬을 강조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미학을 유지한다. 이는 관객이 액션을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이 폭력을 휘두를 때, 그 폭력은 단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며, 이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다. 그러므로 액션은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서사적 언어다. 편집 역시 그 액션의 리듬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급격한 점프컷과 시간 왜곡, 장면의 생략과 반복은 리듬을 불규칙하게 만들며, 관객에게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는 영화 전체의 비선형적 구성과 맞물려 ‘무엇이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흐리게 만든다. 이 불명확함은 인물들이 느끼는 혼란과 좌절을 시청자가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액션은 미학적 쾌감이 아닌, 정서적 고통과 생존의 절박함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한국 액션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연 이 작품은, 액션이 장르적 장식이 아닌, 진심과 현실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 사회의 분노 구조와 폭력의 은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폭력과 분노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안과 결핍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조가 만든 결과이자, 집단적 분노가 축적된 산물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인물들을 제도 밖에 위치시키며, 그들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밀려났고, 어떤 생존 전략을 채택하게 되었는지를 극단적으로 묘사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패한 자들이다. 경찰은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폭력에 의존하며, 청년은 취업 실패 후 범죄로 전락한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도, 가정 폭력의 생존자도, 이 사회에선 아무도 보호받지 못한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선택만이 주어질 뿐이다. 이는 영화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일치한다. 즉, 이 사회에서는 선한 선택을 하기 어려우며, 살아남기 위해선 때로는 비윤리적인 선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고발한다. 폭력은 이러한 구조를 상징하는 핵심 코드다. 그것은 불만의 표현이자, 자기 방어의 수단이며, 때로는 무력감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지만, 그 원인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묻는다. “왜 이들은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가?” 이 질문은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경제적 불안, 청년층의 좌절, 계층 간 불균형과 같은 현실 문제와 맞닿아 있다. 사회적 시스템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며, 실패는 곧 낙오를 의미한다. 복지 제도도, 공공 지원도 부재한 현실 속에서 개인은 오직 자신만을 믿고 살아야 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관객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도록 만든다. 이 영화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이 질문이다. ‘폭력은 나쁜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만든 결과인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공포도, 귀신도, 괴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존재는 결국 시스템의 외면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괴물’들이다. 이 영화는 그런 괴물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쉽게 단죄할 수 없도록 한다. 이러한 윤리적 모호성은 영화의 핵심 미학이며, 또한 가장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분노의 폭력성)는 단순한 액션 누아르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분노, 제도 밖 개인들의 절망, 그리고 그로 인한 폭력의 기원을 심도 깊게 파고든 수작이다. 이 영화는 저예산이라는 제약을 넘어서, 강력한 에너지와 진심으로 관객을 압도하며,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문제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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