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25년 경력의 제지회사 직원이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뒤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없애듯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입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9분간 기립박수를 받았고 로튼토마토 신선도 100%를 유지 중인 작품이죠.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극장 로비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만큼 여운이 강했습니다.
해고는 살인과 같지 않은가
영화 속 주인공 만수(이병헌)는 "해고라는 건 도끼로 사람 목을 치는 짓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실제 살인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고 가족을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해고는 살인과 다를 바 없다는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IMF 시절을 겪은 분들이라면 이 대사가 과장이 아님을 알 겁니다.
만수는 가짜 채용공고를 만들어 경쟁자들을 유인한 뒤 직접 그들을 제거합니다. 해고당한 피해자가 이번엔 해고의 주체가 되는 아이러니죠.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직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직장을 잃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경험이라는 걸 영화는 극단적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일부에선 살인이라는 설정이 지나치게 극적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실직으로 인한 가정 파탄과 극단적 선택은 뉴스를 통해 계속 접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화는 그걸 은유가 아닌 직접적 행위로 치환했을 뿐입니다.
종이라는 상징과 AI 시대의 질문
만수가 평생 몸담은 제지업은 단순한 직업이 아닙니다. 종이는 그의 가족사가 새겨진 역사이자 인생 그 자체죠. 영화 속에서 만수는 "종이 만드는 나무는 따로 키워서 베고 또 심어서 키우고"라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그가 손수 지은 집 옆 온실, 창고를 부수고 만든 그늘까지 모든 게 종이로 번 돈으로 이뤄낸 것들입니다.
하지만 AI 시대를 맞이한 지금, 종이의 의미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력서조차 이메일로 보내는 시대에 종이에 집착하는 만수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지업이라는 직업 선택 자체가 감독의 의도적 설정이라고 봅니다. 필요하지만 쓸모를 다하면 사라지는 종이처럼, 경력직 중년 남성의 처지를 은유한 거죠.
경쟁자로 등장하는 구범모(이성민)도 똑같습니다. "난 이렇게 살게 돼 있어. 어쩔 수가 없어"라며 종이밖에 모르는 25년 경력자의 절박함을 보여줍니다. 그의 딸은 카페를 차리라고 하지만 범모는 종이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 모습이 저한테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평생 한 분야에 몸담은 사람에게 새 출발은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람과 종이는 같은 운명인 듯 본 영화에서는 정말 잘 연결시켜 둔 것 같습니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은 쓰임새가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안 되는 선택을 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측 불가능한 결말과 배우들의 호흡
원작 소설을 읽은 저도 결말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만수가 만나는 경쟁자들은 모두 그 자신의 다른 모습입니다. LP로 옛 노래를 듣는 범모, 딸을 위해 구두를 파는 고시조(차승원), 잘나가는 반장 최선철(박희순)까지 모두 가족을 위해 살아온 평범한 가장들이죠.
이병헌의 표정 연기는 정말 큰 스크린으로 봐야 합니다. 처음엔 착하고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만수가 점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과정이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더 알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면서도 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표정이 소름 돋았습니다.
이성민과 여란 부부의 호흡은 압권이었습니다. 등산하며 재취업 걱정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표정만으로도 25년 부부의 역사가 느껴졌습니다. 차승원은 구두 판매원으로 나오는데 이 또한 몰락한 경력직의 현실을 보여주는 캐릭터죠. 배우들 모두 자신의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같은 직무의 경력을 가지고 경쟁 사회에서 남들보다 먼저 선택 받아야 하고 그 선택의 결과에 수긍하거나 결과에 도전하거나 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사회, 오랜 숙련을 가지고 장인이 되어 있음에도 지속적인 경쟁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들면 물러나야 하는 현실과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도태되는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직업인들의 현실적 이야기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볼 때 더 많은 걸 발견했습니다.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만수를 다양한 앵글로 담아내며 우리가 이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만든 만수의 집은 70~80년대 부유층 주택 양식인데, 풍족해 보이면서도 집 뒤편 우거진 숲은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시각적 디자인까지 고려한 집의 배경 역시 세세한 부분까지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추석 연휴에 가족과 함께 보기 좋은 영화라는 평이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재취업을 준비 중이거나 직장 내 위치에 불안을 느끼는 분들이 보면 더 깊은 공감을 할 겁니다. 노후를 맞이하며 직장의 위기에 처해져 있는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시각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시 볼 때 전혀 다른 느낌의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해외 관객들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 비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 관객에게는 내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게 사실입니다. IMF를 경험한 세대라면 더욱 그렇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