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피해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기억과 증언, 역사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 작품입니다. 단순한 피해 사실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의 용기와 사회가 들어야 할 책임을 함께 강조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증언이 지니는 윤리적·사회적 의미를 관객에게 강하게 전달합니다. 본문에서는 영화 속 증언의 구조, 증언을 둘러싼 개인의 서사, 그리고 그것이 국제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분석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자리: 고통의 개인화에서 기억의 사회화로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였던 나옥분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는 것’이 단순한 기억의 환기나 고백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며 사회적 연대의 출발점임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관공서에서 민원을 반복적으로 제기하며, 단순히 고집 센 노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쌓아온 민원은 ‘말하고 싶은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사회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배제되어 왔는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전략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는 단순히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에 침묵당했던 기억을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언어’로 직접 말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이로써 그녀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닌, 적극적인 증언 주체로 자리합니다. 이 변화는 영화의 중심 서사이며, 한국 사회 내에서 피해자 정체성이 종종 박제되거나 고정된 서사로 소비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반영합니다. 영화는 그녀의 이야기를 단지 비극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유쾌하고 다정한 태도 속에서 고통이 ‘삶과 분리되지 않은 채’ 유지되는 복합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구성은 증언이란 곧 삶의 일부이며,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증언의 윤리와 감정의 공유: 청자를 만드는 사회
‘아이 캔 스피크’는 나옥분의 증언이 국제무대에서 영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단지 발화의 문제가 아닌 ‘전달’과 ‘청취’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이는 증언의 윤리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으며, 과거를 증언하는 일이 단지 개인의 치유를 넘어서, 사회가 이를 어떻게 듣고 반응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증언 장면은 감정적 클라이맥스이자, 영화가 지닌 사회적 메시지의 정점입니다. 영어라는 낯선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그녀의 용기는, 단지 언어 습득의 성취가 아닌, 자기 존재의 재구성과도 관련됩니다. 침묵이 강요되었던 과거에서 목소리를 찾고, 더 나아가 그것을 확장하려는 노력은, 그녀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수많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여성들의 연대이기도 합니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닙니다. 증언자는 자신의 고통을 말로써 전환하고, 타인에게 그 감정과 의미를 공유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때 청자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영화는 박민재라는 인물을 통해 ‘경청자’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관료적인 태도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그녀의 서사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지지하게 되며, 그녀의 증언이 사회에 전달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증언은 결코 개인적인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기억으로 흡수되고, 그 기억은 다시 현재의 윤리적 판단에 영향을 줍니다. 영화는 이 점을 정교하게 설계하여, 관객이 단지 감동에 머무르지 않고,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국제사회와 기억의 정치: 증언을 통해 역사 쓰기
나옥분이 자신의 경험을 국제무대에서 증언하는 장면은 단지 극적 장치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오랫동안 일본 정부의 부인과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피해자가 직접 세계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발언이며, 무시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국제무대에서의 증언은 단순히 국가 간 외교 문제가 아닌, 세계사 속에 포섭되어야 할 여성 인권의 문제로 전환됩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이를 매우 조심스럽고도 단호하게 표현합니다. 영화는 피해자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을 열고, 증언이 ‘국적 없는 진실’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전환은 영화의 메시지를 한국 사회 내부로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가 기억해야 할 ‘인류 보편의 기억’으로 확장시킵니다. 또한, 이는 증언의 힘이 과거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바꾸기 위한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나옥분의 말은 단지 회고가 아니라, 경고이자 제안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을 듣는 것은 전 세계의 몫이며, 이 영화는 그 소명을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위임합니다. 영화는 또 다른 피해자들의 존재를 암시함으로써, 나옥분의 이야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너무 흔하고 반복되어 온 역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은 묻게 됩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증언은 발화로 끝나지 않으며, 그 기억을 계승하는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증언의 의미를 단지 과거를 드러내는 행위로 제한하지 않고, 사회적 기억과 윤리, 그리고 역사 정립의 차원까지 끌어올립니다. 나옥분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함께 기억할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됩니다. 침묵을 넘어선 증언은 단지 목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태도와 응답의 문제임을 영화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