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라그나로크(Thor: Ragnarok, 2017)’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17번째 작품이자, 토르 솔로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로, 이전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톤과 분위기를 자아내며 전작을 뛰어넘는 평가를 받았다. 전작의 중후하고 신화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코미디와 컬러풀한 비주얼, 빠른 전개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 작품은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의 독창적인 연출 스타일이 전면에 드러나는 영화다.
토르의 탈피와 정체성 재구성
‘토르: 라그나로크’의 가장 중심적인 서사는 토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 재구성에 있다. 이전 시리즈에서 토르는 천둥의 신, 오딘의 아들이자 아스가르드의 왕위를 이을 자로서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영웅상을 대표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그가 기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재탄생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토르가 사투르와 싸우며 라그나로크의 예언을 알아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토르는 이 위협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투르의 왕관을 가져와 아스가르드의 화산 속에 보관하지만, 이는 오히려 운명을 더욱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 영화 초반, 토르는 오딘이 실종되었고, 로키가 그의 자리를 가짜로 차지하고 있음을 알아낸다. 이 장면에서부터 토르의 신화적 영웅성은 하나둘 무너져 내린다. 그는 형과의 갈등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그 여정 속에서 자신의 힘의 본질과 존재 이유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특히 헬라와의 대면은 그에게 정체성의 전환을 강요한다. 헬라는 오딘의 첫째 딸이자 전쟁의 여신으로, 토르와 로키가 존재하기 전부터 아스가르드의 정복 전쟁을 함께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오딘이 자신의 과거를 숨긴 대가로 세계에 재앙을 불러오고, 토르 역시 아버지의 유산이 결코 정당하거나 깨끗하지 않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토르는 헬라와의 전투에서 망치를 잃게 된다. 묠니르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그동안 토르의 힘의 상징이자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묠니르가 파괴되면서 토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힘이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그가 단지 외부의 도구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릴 수 있는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깨달음은 영화 후반부, 아스가르드를 구하기 위한 전투에서 절정에 달한다. 토르는 또한 왕이 되기 위한 진정한 자질을 배우게 된다. 이전까지 그는 전쟁과 힘으로 지배하는 지도자를 모델로 삼았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희생과 판단, 협력과 리더십을 통해 진정한 리더로 거듭난다. 아스가르드의 물리적 장소는 파괴되지만, 그는 “아스가르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말을 통해 민족의 본질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과 문화에 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와 같이, ‘토르: 라그나로크’는 단지 액션이 중심이 아닌, 캐릭터의 정체성과 가치관의 변화, 성장을 그리는 성장 서사이다. 토르는 왕자가 아닌 리더로, 무력의 신이 아닌 지혜와 희생의 상징으로 거듭나며, MCU 전체 서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헬라와 아스가르드의 그림자: 숨겨진 역사와 파괴의 정당성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등장한 헬라는 마블 영화 역사상 가장 상징적이고 강력한 여성 빌런 중 하나다. 그녀는 단순히 힘이 센 적대자가 아니라, 아스가르드의 숨겨진 과거와 죄를 대변하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헬라는 오딘의 첫째 딸이자 아스가르드의 확장을 함께 이끌었던 존재로, 피의 정복 전쟁을 통해 아홉 세계를 통합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오딘은 점차 평화를 추구하게 되면서 그녀를 두려워하고, 그녀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워버린다. 이는 마치 제국이 성장 과정에서 저지른 폭력과 착취를 감추기 위해 과거를 삭제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헬라는 과거의 진실을 폭로하며, 현재의 아스가르드가 쌓아온 평화가 피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녀는 단지 권력을 되찾으려는 인물이 아니라, 억눌린 진실과 역사적 책임의 화신으로 볼 수 있다. 그녀가 오딘의 벽화 뒤에 숨겨진 과거의 전쟁 장면을 폭로하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매우 강렬하다. 이는 오늘날 현대사 속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진실을 무시하거나 지워버리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다. 헬라의 힘은 아스가르드에서 극대화된다. 그녀는 죽음의 신으로서 무한에 가까운 전투력을 가지며, 엘리트 병사들과 전설 속 늑대 펜리스까지 부활시킨다. 그녀는 과거의 힘과 피의 유산을 상징하는 동시에, 현재의 체제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림자를 대변한다. 아스가르드 시민들에게도 그녀는 두려움의 존재지만, 동시에 잊힌 진실을 보여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는 헬라를 단순한 악당으로 그리지 않고, 그녀의 존재 자체에 정치적, 철학적 메시지를 부여한다. 헬라의 파괴는 무차별적이지만, 그 동기는 오딘과 아스가르드가 저지른 과거의 불의에 기반한 것이다. 이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을 제공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로운 통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헬라의 극단적인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녀가 드러낸 진실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깊은 윤리적 딜레마를 제시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토르와 로키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 스스로 선택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특히 로키는 그동안의 배신과 음모를 뒤로하고, 형과 협력하며 새로운 형태의 책임감을 보여준다. 두 형제는 헬라를 막기 위해 라그나로크, 즉 아스가르드의 멸망이라는 선택을 받아들이며, 진정한 구원을 이루게 된다. 이는 ‘파괴를 통한 재창조’라는 고전적 서사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이며, 파괴가 단순한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헬라는 단지 물리적으로 강력한 빌런이 아니라, 역사와 권력, 억압된 진실의 메타포로서, 영화 전체의 주제를 상징하는 핵심 인물이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헬라를 통해 아스가르드의 정체성과 윤리를 다시 묻고, 그것을 통해 기존 MCU의 통상적인 선악 구도를 뛰어넘는 깊이를 확보하게 된다.
코미디와 컬러, 그리고 사카아 행성의 해방서사
‘토르: 라그나로크’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영화의 톤과 분위기다. 기존의 마블 영화들과 비교해도 이 작품은 유난히 밝고, 경쾌하며, 유머러스하다. 이는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의 연출 스타일이 적극 반영된 결과로, 그만의 독특한 개그 감각과 캐릭터 간의 티키타카는 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특히 토르와 헐크, 로키, 발키리, 그리고 그랜드마스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유쾌한 군상극을 만들어낸다. 사카이 행성은 이러한 유쾌한 분위기의 핵심 무대다. 우주의 쓰레기장이자 독재자 그랜드마스터의 통치하에 있는 이 행성은, 비주얼적으로도 사이키델릭 한 색감과 독특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고전 SF와 80년대 레트로 감성이 결합된 이 공간은 관객들에게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영화의 독창성을 극대화한다. 토르가 이곳에 추락하여 헐크와 재회하고, 글래디에이터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한 액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곳에서 토르는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특히 발키리는 술에 취한 퇴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 헬라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로, 아스가르드의 진정한 전사 중 하나다. 그녀의 캐릭터는 강인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여성 히어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발키리는 토르와 함께 ‘리벤저스’를 결성하며 사카이에서 탈출하고, 아스가르드를 구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한다. 또한 헐크의 존재도 중요하다. 그는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이후 사라졌다가, 사카이에서 글래디에이터로 등장한다. 이곳에서 그는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고, 완전히 헐크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토르와의 재회, 발키리와의 교감 등을 통해 그는 다시 브루스로 돌아가고, 두 자아의 균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헐크라는 캐릭터가 내면의 분열과 감정의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사카라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탈출, 그리고 그랜드마스터의 몰락은 단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아니라, 억압된 민중의 해방과 독재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유머와 액션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하며, 관객들에게 가벼움 속에서도 묵직한 의미를 던진다. 특히 그랜드마스터가 몰락하고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은 단순한 통쾌함을 넘어서, 집단의 각성과 저항의 서사로 기능한다. 결론적으로 ‘토르: 라그나로크’는 코미디와 컬러풀한 비주얼, 그리고 유쾌한 캐릭터들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형태의 마블 영화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정체성과 진실, 권력과 억압이라는 진지한 주제들이 녹아 있으며, 이는 영화가 단순히 웃기기 위한 작품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균형은 타이카 와이티티 특유의 연출력 덕분이며, 그 결과 MCU 내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단순히 토르 시리즈의 연장선이 아니라, 기존 MCU의 문법을 탈피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한 작품이다. 캐릭터의 재정의, 역사적 반성, 유머와 색채의 조화는 이 작품을 단순한 히어로 영화를 넘어선 하나의 완성도 높은 서사로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마블 영화의 미래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