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영화 ‘염력(Psychokinesis)’은 초능력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기존 히어로물과는 매우 다른 접근 방식으로 ‘한국형 히어로물’의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갑자기 초능력을 얻게 된 한 평범한 남성이, 소외되고 억압받는 서민 공동체와 소원했던 딸을 위해 행동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존 히어로 장르가 초능력과 전투, 악당 퇴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염력’은 가족, 책임감, 사회 정의와 같은 보다 현실적인 주제와 감정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본문에서는 이 작품이 ‘한국형 히어로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세 가지 키워드—가족 관계의 회복, 책임감의 발현, 평범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 분석해 보겠습니다.

가족 관계의 회복: 초능력을 통한 아버지의 뒤늦은 사랑
‘염력’의 주인공 석헌(류승룡 분)은 딸 루미(심은경 분)와 오랜 시간 단절된 관계를 유지해 온 남성입니다. 그는 평범한 경비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큰 성취도 없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부족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영화 초반, 그는 루미의 존재조차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삶에 대한 의욕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유성을 통해 초능력, 즉 ‘염력’을 얻게 되며 그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초능력이 그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거나, 특별한 사명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여전히 서툴고 부족한 ‘아버지’로 남아 있으며, 초능력은 단지 딸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감정적 서사를 도와주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루미는 시장 철거 문제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석헌은 딸을 돕기 위해 비로소 자신이 외면해 온 삶과 가족, 사회적 부조리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초능력은 ‘가족애’의 도구로 기능합니다. 석헌이 루미를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우고, 자신의 능력을 점차 통제하고 활용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한 스킬의 습득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감정의 복구’입니다. 그는 자신이 져야 했던 책임을 뒤늦게나마 받아들이고, 루미가 겪는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회한이 아닌, 행동을 통해 증명되는 사랑이며, 이 영화가 지닌 ‘현실 기반 히어로 서사’의 핵심입니다. 또한 영화는 석헌의 초능력이 거창한 파괴력이나 구세주적 존재감을 나타내지 않는 점에서도 기존 히어로물과 차별화를 이룹니다. 그는 도시를 구하거나 악당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딸을 위해, 그리고 작은 공동체를 위해 싸웁니다. 그의 초능력은 철거 현장에서 가게를 지키기 위한 수단, 경찰 폭력에 맞서기 위한 방어적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이처럼 영화는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 요소를 통해 오히려 ‘현실의 인간관계와 감정’을 복원하는 과정을 집중 조명합니다. 이러한 서사는 관객들에게 더 강한 감정적 몰입을 유도합니다. 관객은 석헌의 행동 하나하나에 공감하게 되고, 그의 선택이 곧 ‘늦었지만 진심 어린 사랑’ 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석헌이 딸과 화해하고,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관계를 회복하는 장면은 단순한 승리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전합니다. 히어로물이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중 하나가 ‘사랑을 지키는 힘’이라면, ‘염력’은 그 메시지를 가장 현실적이고 감정적으로 완성해 낸 사례입니다.
책임감의 발현: 평범한 가장에서 영웅으로
‘염력’에서 석헌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책임감’이라는 감정의 출현입니다. 그는 영화 초반까지는 책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가족을 등지고, 현실에 무기력하게 적응하며,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능력을 얻은 이후, 그는 점차 자신이 가진 능력을 통해 주변의 고통을 직시하게 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책임감은 단순히 슈퍼히어로로서의 사명감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감정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시장 상인들이 철거 용역에 의해 일방적으로 폭행당하고, 생계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분노를 느끼고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인간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염력’은 히어로 서사를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석헌의 능력과 감정이 성장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처음에는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실수하고,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하지만, 점차 그는 능력을 감정적으로 통제하며 타인을 위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영웅의 성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책임감’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시각화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특히 경찰과 용역이 상인을 강제로 끌어내는 장면에서 석헌이 유리창을 넘어 상인들을 보호하고, 인간 방패가 되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매우 강렬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또한 영화는 석헌의 행동이 ‘혼자만의 영웅적 행동’으로 끝나지 않도록 합니다. 그의 결단은 주변 사람들의 연대와 공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작은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저항 세력이 되는 구조로 확장됩니다. 이 지점에서 ‘염력’은 슈퍼히어로물이 아니라, ‘연대 기반의 시민 영웅물’로 탈바꿈합니다. 석헌은 단독 영웅이 아닌, 공동체의 상징이자, 모두가 함께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러한 설정은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도 의미심장합니다. 권력에 맞서는 개인, 무력한 서민의 연대,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 등은 현실과 맞닿아 있으며, ‘염력’은 이러한 요소들을 히어로물이라는 장르 안에 효과적으로 녹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은 히어로가 특정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특별하다는 메시지를 더욱 강조합니다. 결국 석헌이 보여주는 책임감은 단순한 도덕적 각성이 아니라, 능력을 얻었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선택’ 임을 영화는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히어로물의 윤리적 핵심을 되묻는 동시에,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관객들에게 진지하게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변화: 능력보다 중요한 마음의 전환
‘염력’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초능력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마음’에서 찾습니다. 석헌은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영웅이 될 자질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선택을 통해, 감정을 통해, 점차 ‘영웅 같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 과정은 대부분의 관객이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합니다. 영화는 석헌이 처음 초능력을 얻게 되는 장면도 특별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우연히 유성의 에너지를 흡수했을 뿐이며, 이는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처럼 그려집니다. 이후 석헌이 보여주는 변화는 능력의 강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는 무기력하던 삶에서 벗어나, 딸과 타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며,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힘’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감독 연상호는 이전 작품 ‘부산행’과 마찬가지로, ‘염력’에서도 초능력보다는 인간성, 공동체, 감정의 복원을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합니다. 이 영화가 히어로물임에도 불구하고, 눈물과 웃음이 섞인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석헌을 보며, 특별한 영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가려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헌이 자신의 능력을 버리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는 장면은 히어로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설정입니다. 그는 초능력을 유지한 채 세계를 구하거나, 악당과 싸우러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딸과의 일상을 선택하며, 진정한 히어로란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이와 같은 구조는 한국형 히어로물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서구의 히어로물이 화려한 능력과 대결 구도에 집중한다면, ‘염력’은 인간의 내면과 감정, 선택과 관계 회복에 중심을 둡니다. 이는 보다 현실적이며, 감정적으로 깊은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히어로물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염력’은 결국 ‘변화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능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다시 사랑하려는 의지’, ‘지키고 싶은 존재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인간 중심의 서사 구조는 앞으로 한국형 히어로물이 어떤 방향으로 확장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염력’은 초능력을 다루고 있지만, 그 핵심은 능력이 아닌 인간의 감정, 관계, 선택에 있습니다. 평범했던 한 남성이 가족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한국형 히어로물의 본질을 정립한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영웅이란 결국 사랑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라는 진실을, ‘염력’은 조용하고 깊게 말하고 있습니다.